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문단 편집) === 3기: 빌란트-볼프강 형제 시대 ===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연합국은 바그너 일가로부터 페스티벌 극장의 경영권을 몰수했고 페스티벌 하우스는 장병들을 위한 쇼를 여는 극장으로 전락했다. 나치 정권과 유착 혐의를 받은 비니프레트 바그너가 퇴진하고, 그녀의 아들이자 바그너의 친손자인 빌란트 바그너와 볼프강 바그너 형제가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빌란트, 볼프강 형제는 페스티벌의 경영권을 되찾고 페스티벌을 재개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1951년 여름 페스티벌이 재개되었다. 지휘자로는 비록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출연을 거절했지만, 한스 크나퍼츠부쉬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직접 연출을 담당한 빌란트 바그너는 이전과 다른 파격적인 현대적인 연출을 선보였다. 그는 구체적인 무대배경을 없애고 정교한 조명 조작을 통해 인물들의 심리를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일부는 그가 돈이 없어서 무대 세트도 만들지 않고 연출을 했다고 푸념하기도 했지만 그의 새로운 연출은 큰 호평을 받아 신바이로이트 양식(Neue Bayreuth, New Bayreuth)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지금도 현대적 오페라 연출의 선구자로 꼽히고 있다. 또 이러한 현대적 연출은 바이로이트에 부담이 되고 있던 나치와의 관련성을 제거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동생 볼프강 역시 직접 연출을 맡기도 했으나 형보다는 재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볼프강은 연출보다는 극장 경영에 주력했다. 그러나 초기에는 빌란트 바그너의 신바이로이트 양식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다. 빌란트 바그너 역시 원래 연출 경험이 부족했던 만큼 초기에는 시행착오가 있었으나 이를 개선해 나갔다. 50년대 초에는 페스티벌의 방향성 등에 대한 갈등으로 카라얀, 요훔과 같은 거장 지휘자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50년대 중반 카일베르트, 클뤼탕스, 크라우스 등이 가세했는데, 이들은 전임자들에 비해 네임 밸류가 떨어졌지만 음악적으로는 의외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훗날 뒤늦게 공개된 이 시절 연주들은 음악적으로 상당한 퀄리티를 보여주어 바그네리안들을 열광하게 만들기도 했다. 1960년을 전후로 볼프강 자발리쉬, 칼 뵘, 루돌프 켐페 등이 가세하여 완숙해진 빌란트 바그너의 연출과 시너지를 일으키며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예술적으로 정점을 맞게 되었다. 1966년 빌란트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후 동생인 볼프강 바그너가 단독으로 극장을 이끌게 되었다. 형에 비해 예술적 재능은 떨어졌지만 경영자로서의 자질은 뛰어났던 볼프강 바그너가 전권을 잡으면서 페스티벌은 다시한번 변화를 맞이했다. 1967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일본 오사카에서 원정 공연을 하여 화제를 모았다. 비록 지휘자가 기존의 칼 뵘에서 피에르 불레즈 등으로 교체되었지만 그 밖에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과 동일한 가수들과 연출, 무대 세트로 이루어졌다. 이때 공연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일본에서 흑백 영상물로 녹화되었는데, 시대를 풍미했던 빌란트 바그너의 연출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이 되었다.[* 비록 빌란트 바그너가 사망한 후의 공연이지만 그의 연출을 그대로 따라 공연되었다. 주연인 볼프강 빈트가센, 브리기트 닐손은 이미 빌란트 바그너의 연출로 10년 가까이 연기해왔던 가수들이다.] 또 볼프강 바그너는 자신의 직접 연출을 크게 줄이고,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외부의 저명한 연출가를 초빙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파격적인 쪽으로 유명한 연출가들 위주로 섭외했다. 그가 섭외한 연출가들은 파격적인 연출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1976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개관 및 니벨룽의 반지 초연 100주년을 기념하여 새로 제작된 반지 프로덕션은 큰 기대를 모았다. 이 프로덕션에서 파트리스 셰로와 피에르 불레즈가 각각 연출과 지휘를 맡았는데 이 공연의 파격적인 연출과 해석은 큰 논란을 야기했고 급기야는 [[바그네리안]]들이 바이로이트에서 반대 피켓 시위를 벌이는 일이 발생했다. 이러한 논쟁으로 인해 페스티벌은 매스컴에 자주 노출되었고 결과적으로 예술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더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렇게 섭외된 연출가 중에는 [[베르너 헤어조크]]도 있는데, 그는 1987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로엔그린]]을 연출했고 이 당시에 대한 기록으로 음악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또 볼프강 바그너는 칼 뵘, 요제프 카일베르트, 루돌프 켐페, 볼프강 자발리쉬, 앙드레 클뤼탕스 등 기존에 바이로이트에서 검증된 지휘자들 대신 파격적이고 젊은 지휘자들을 기용했다. 그 첫 주자는 피에르 불레즈였다. 불레즈는 1966년 파르지팔의 지휘를 맡아 색다른 해석을 선보이며 논란을 야기했다. 이어 로린 마젤(1968년), 카를로스 클라이버(1974년), 콜린 데이비스 등 소장파 지휘자들이 바이로이트에 데뷔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이로이트에서 단기간 지휘하고 떠났다. 음악적 해석 역시 60년대의 거장들의 지휘에 비해 호불호가 갈리는 평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 6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초까지 바이로이트는 이런 유명세 있던 젊은 지휘자 외에 호르스트 슈타인, 실비오 바르비소, 페터 슈나이더 등이 이끌게 되었다. 이들은 대중적 지명도는 떨어졌지만 건실한 오페라 지휘자들이었고 그들의 공연 역시 음악적으로 훌륭했다. 하지만 빌란트 시절의 주요 지휘자들이었던 뵘, 카일베르트, 켐페 등을 계속 기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70년대에 주로 파격적인 이슈로 화제를 모으는데 주력했던 볼프강 바그너는 80년대에 이르자 네임밸류 있는 지휘자들을 초빙하여 내실을 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하여 [[다니엘 바렌보임]](1981년), 제임스 레바인(1982년), [[게오르그 솔티]](1983년)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데뷔했다. 역시 가장 큰 화제를 모은 것은 게오르그 솔티와 피터 홀을 영입하여 선보인 반지 4부작이었다. 이례적으로 자연주의적 연출을 취해 보수적인 청중들의 취향에 부합하려 했으나 진보적인 평단의 평가는 좋지 못했다. 게다가 큰 화제를 몰고 왔던 솔티가 단 1시즌만에 하차하고 말았다. 그러나 바렌보임과 레바인은 뛰어난 음악성에다가 의외로 바이로이트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이며 약 20년간 바이로이트에 봉직하면서 페스티벌을 중흥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90년대에는 주세페 시노폴리가 가세하며 바이로이트의 음악성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른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다. 대신 바렌보임과 레바인이 바이로이트에서 은퇴할 무렵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데뷔하여 현재까지 약 20년 가까이 페스티벌을 이끄는 주요 지휘자가 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